Book 돋우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vs 소설)

베푸 2021. 3. 28.

 

요즘 티비를 잘 틀지 않는다.

 

티비를 안보려고 애썼던건 채식을 하면서부터였던것 같다. 티비를 틀지 않았을때 생각도 나지 않고 평화롭던 내 마음이 티비에서 나오는 각종 음식들을 보면 먹고 싶고 요동치는게 싫었다.

내 몸의 진정한 필요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그것을 먹고싶다’거나 ‘그 식당에서 먹고 싶다’는 욕구의 대부분은 외부에서 온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 오롯이 있을 때 느끼는 근본적인 필요가 아니다.
이 욕구를 부추기는 것은 산업과 광고, 비즈니스이고, 결국 이윤의 추구이다.
이 ‘현혹하는 사회’에서 외부에 현혹되는 우리의 욕구 또한 끝이 없다.
문숙, <문숙의 자연식> 중에서

보고 싶은 프로그램 시간에만 TV를 켜거나 방송시간과 상관없이 우리가 시간될 때 찾아보고, 요즘엔 책을 더 본다. 그리고 친구가 준 왓차 이용권 덕분에 영화도 더 본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았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이름도 많이 듣고 패러디 하거나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것도 많이 들었는데 이제서야 보게됐다.

 

긴 러닝타임이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영화는 너무도 재미있었다.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모습을 보는것도 좋았고 시대배경도, 스토리도 훌륭했다.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데 스콧 피츠제럴드 원작이란다. 스콧 피츠제럴드면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던가? 그래서 1900년대 초기를 이렇게 잘 그렸나 싶기도 하고 원작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영화를 본 뒤 책을 찾아 읽었다.

 

내 예상과 다르게 원작은 단편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벤자민은 1918년 생이었지만 소설에선 1860년 생이라 시대도 달랐다.

 

둘 다 전쟁에 나가긴해도 영화에서는 2차대전, 소설에선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한다.

 

소설은 시작부터 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도대체 어떻게 태어난건지 이해되지 않게 이미 덩치도 어른만큼 크고 말도하는 노인인채로 벤자민은 태어나 있었다.

 

가문의 수치스런 비밀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려진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벤자민의 생활도 나아졌다. 아버지의 철물도매 사업을 물려받아 미모의 여성과 결혼하고 화려한 시대를 과시하며 사는 커플의 모습에선 스콧 피츠제럴드의 실제 모습도 느껴졌다.

 

소설은 영화보다 우울했다. 힐데베르크(부인)가 40이 되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 벤자민은 곁을 떠나 참전하고, 아들은 자랄수록 어린 아버지를 창피해하며 괄시한다. 대학에 다시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자신이 누군지 조차 모르게 점점 더 어려지다 끝내는 보모 나나 와 생활하다 벤자민은 사라졌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기발한 아이디어였지만 조금 씁쓸했다.

 

나는 보통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본다. 책을 먼저 읽으면 주인공의 모습이나 장면을 상상하게 되고 내 상상과 시각화된 작품의 싱크로율이 어떤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영화를 먼저보고 책을 읽으면 책을 읽을때 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미지를 하나밖에 누리지 못해 손해보는 느낌이다.

이 작품은 책을 나중에 읽었어도 전혀 영화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으로 태어나 어려서 죽는다는 것과 군대를 간다는 정도의 큰 틀을 빼고는 다른 인생을 다룬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원작을 따라올 수 없구나?’ 하는 대개의 평과 달리 이 작품은 영화가 더 좋았다.

이렇게 짧은 소설을 바탕으로 3시간짜리 긴 영화를 만들었다는것도 대단하고 영화라는 미디어가 주는 시각적 변화(벤자민 모습이 훅훅 변함)도 좋았다.

냉정하고 다소 우울한 결말의 원작에 비해 거꾸로 가는 벤자민이 사랑하는 사람 무릎에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다는 것도 좋았고, 구성을 극중극 형식으로 만든것도 좋았고,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시계공 부부의 거꾸로 가는 시계 이야기를 맨 앞에 첨부한것도 좋았다.

 

원작에서 벤자민 버튼은 철물사업을 하는데, 영화에서는 이름에 걸맞은 ‘버튼’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것도 위트있게 느껴졌다. 80노인으로 태어난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양로원 앞에 버린다는 설정도, 나중에 아버지를 만났어도 사업을 물려받지 않고 원래 본인이 하던 일을 주체적으로 하는것도 좋았다.

 

원작에선 아버지가 점점 어려지는걸 창피해하는 아들이 벤자민을 괄시하지만, 영화에서 벤자민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떠나고 홀로 전세계를 떠다니다 어린 모습이 되어 기억하지 못할때에서야 자신이 살던 양로원으로 돌아온다. 너무도 딸을 안고싶고, 자전거도 밀어주고 싶고,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궁금하다는 마음을 편지로 남긴 아버지. 그 편지를 읽는 장면에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영화에서 벤자민이 노인으로 태어난건 별로 슬프지 않았다. 늙은 몸이지만 받아준 엄마가 있었고, 같이 놀아준 친구가 있었고, 전쟁이 났을때도 그를 믿어준 선장님이 있었고, 사랑에 빠지기도 해봤다. 그의 삶이 슬프다고 느꼈던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늙어갈 수 없을때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이가 된 나를 책임지게 할 수 없다는 마음, 딸이 평범한 아버지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전재산을 남기고 떠난 벤자민.

회귀본능이었을까? 기억은 잊은채 다시 돌아왔을때 이번엔 아기가 된 벤자민을 데이지(사랑하는 여자)가 돌본다. 그리고 그 무릎에서 최후를 맞는다.

 

진부한 소리 같지만 삶은 부자일때와 가난할때, 명성이 높을때와 낮을때 행복하고 불행한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믿어주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을때와 없을때로 행. 불행이 나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후세대의 각색이 훌륭한 콜라보를 이뤘다. 멋진 작품이었다.

5년후, 10년후에 다시 볼때는 어떤 감상일지 궁금하다.

 

시간을 두고 계속 다시 보게될 작품!!

당장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작품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젊음의 감수성을 담은 재즈 시대의 단편들!<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 단편집 <재즈 시대 이야기>를 완역한 책. 데이비드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벤자민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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