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돋우다

찰리 채플린 영화처럼 씁쓸한 여운이 남는 쾌감 <보건교사 안은영>

베푸 2021. 3. 31.

 

 

서점에 가는건 좋아하지만 책 읽는건 별로인 곰이랑 얼마전 교보문고에 갔다. 나는 같이 책읽고 또 얘기도 하는게 로망인데 한결같이 자기는 이과(무슨 상관?)라고 주장하는 곰은 별로 그럴 뜻이 없어보인다.

 

올 들어 티비를 켜지 않고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보는걸 습관화 하다보니 자연스레 책보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곰은 주로 옆에서 노트북 작업을 하는데 같이 책을 보고 싶은 욕심에 읽고 싶은 책을 사주겠다고 골라보라고 했다.

 

잠시 당황하던 곰이 ‘주식부자 되는법’ 같은 책을 고르려고해서 재빨리 그 옆 매대에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을 건넸다. ㅋㅋㅋㅋㅋ

같이 읽고 넷플릭스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는게 어떠냐고 제안하면서...

(결국 고른게 아니네.. 담에 다시 고릅시다...)

 

책보단 그 드라마가 궁금했던 곰이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사온 ‘곰의 책’!!!

‘보건교사 안은영’

 

내용과 상관없이, 이 책을 읽는동안 즐거웠다.

한 공간에서 각자 자기 책 들고 집중해있는 내 로망이 실현되었다. 뭔가에 집중한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세는 이상했지만 참 사랑스러웠다.

자기는 다 읽었으니 넷플릭스 보게 얼른 읽으라며 재촉하는 그 말투에는 우쭐함이 배어있었다 ㅎㅎ그조차도 쫌 귀여웠다. (완독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겠어. 맘껏해.. ㅋㅋㅋ)

 

지난 주말, 나도 책을 읽은 뒤 우린 넷플릭스 안은영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책엔 저러지 않았다며 아는걸 서로 경쟁하듯 이야기하면서 ㅋ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오직 쾌감을 위해 썼다고 했다. 그말대로 참 재미있었다.

귀신들이랑 싸우는데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이 왠말인가? 보호막이 강한 선생과 손을 잡으면 충전이 되고, 사람을 볼 때 ‘에로에로 에너지’를 중요시하며, 되게 멋있는것 같은데 또 쫌 어설프고 웃긴 보건교사 ㅎㅎ

 

그런데 그냥 막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내용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썩같이 믿어버린다. (38p)

 

고등학생이란 믿어서는 안되는 어른의 말까지 믿는 존재라는 말에서 세월호가 떠올랐고,

 

학교 근처에서 큰불이 난 다음이었다. 그 건물은 성매매 여성들의 숙소였는데 포주가 현관도 창문도 바깥에서 잠가 뒀기 때문에 열여섯 명이 죽었다.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185p)

 

얼굴에 젤리가 튀어 뜨거웠던 날은 이런 잔인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라 더 잘 기억한다.

 

학교다닐때 은영의 캐릭터를 설정해 준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 으로 귀엽게) 친구는 나중에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데...

 

말끄름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강선이 말해 주었다. 은영은 문득 크레인 사고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되짚어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크고 무거운 기계가 중심을 잃고 부러지고 휘어지고 떨어뜨리고 덮치는 일이 흔하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189p)

 

사람보다 비싼 불량 크레인 때문에 사고로 죽어서 나타난다. 고통을 느낄새도 없이 피할겨를도 없이 즉사했다고 한다.

 

정말 기발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옴잡이 여학생은 옴이 너무 많이 나올때만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인데 여자로 태어난건 이번생이 처음이란다.

 

“여자로는 처음 태어났습니다.”

“마흔 몇 번 태어나면서?”

(....)

“여자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자로 다른 사람 슬쩍 만지는거(<-옴을 떼어내주기 위해) 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게다가 전란 시에는 강간 살해의 위험도 훨씬 높습니다. 제 선택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는 자동으로 늘 남자였어요.”

(208p)

 

옴잡이가 여자로 태어날 수 없었던 이유를 들으면서 ‘그렇구나~’ 싶었다. 여성의 인권에 대해,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해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물에 대한 생각이나 동성애에 대한 작가의 생각도 엿볼 수 있었다.

 

매켄지는 딱 보기에도 새것인 송치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보는 능력이 있으면서 어미 배 속의 새끼를 꺼내 만드는 가죽을 택하다니 그런 점이 너무나 매켄지 다웠다. 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잔인한 공정의 가죽 제품이나 기름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차에 무딜 수 있다. 하지만 뚜렷하게 보는 사람이 하는 선택치고는 가장 나쁜 선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209p)

 

오리 농장 주인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끝까지 듣더니 가격을 불렀다.

“2600원 주세요”

....... 그렇구나. 식육용 오리는 그렇게 비싼 동물이 아니구나. (.....)

오리의 수명은 30년에 가깝다. 중간에 크게 다치지않았더라면 더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34년을 학교의 마스코트로 살았다. (141p)

 

그 주에 서로 사귀던 여학생 커플이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은 교사들도 다 알고 있었다. (....) 때린 아이를 다그쳤는데 그 나이 특유의 방어적인 얼굴로 한 아이가 말했다.

“ 더러워서요. 더러워서 때렸어요.”

더러운 게 뭔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게 교사로서 참담했다. (249p)

 

<보건교사 안은영>은 분명 재미있다. 보면서 키득키득 웃기기도 귀엽기도 하다. 그래서 쾌감이 있지만 또 위에 언급한 내용들처럼 묘하게 씁쓸하다. 이 별난 이야기가 별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좋았다.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또 소외된 힘없는 생명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볼 계기를 줘서 고마웠다.

 

그렇다고 이상하거나 우울하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유없는 친절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남아있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117p)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참 좋았다.

 

학생들은 대흥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대흥의 기대보다 자주 하곤 했다. 이를테면 ‘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선거에서 뽑히나요? 왜 좋은 방향으로 일어났던 변화들이 무산되나요? 왜 역사는 역류없이 흐르지 못하나요?’ 그런 질문들이었다.

(...)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232-233p)

 

그래도 인테리어 취향 차이에서 오는 괴로움을 빼면 전반적으로는 만족할 만했다.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272p)

 

<보건교사 안은영>은 술술읽히고 아이디어가 참신하며 재미있다. 그냥 재미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숨어있다.

넷플릭스 드라마는 아마도 속편을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래서 아직 섣불리 얘기할 순 없지만 원작에서 보여주는 씁쓸한 우리 세계의 모습, 그 위에서 일어나는 친절함과 악함이 어우러진 이상함을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쉬웠다. (젤리가 터지는 모양은 상상한것보다 예뻤다)

 

정세랑 이라는 작가가 좋아졌다.

다른 작품들도 다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들만큼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보건교사 안은영

발랄하고 용감한 여전사이자 동시에 다정하고 유쾌한 언니, 안은영!문학성과 다양성, 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의 작품을 엄선한 「오늘의 젊은 작가」의 아홉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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