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푸 에세이

베토벤, 합창

베푸 2021. 12. 29.

 

바쁘고 기분좋은 하루였다.

 

낮엔 한살림 절기모임이 있었다.

자연의 속도로 절기에 맞는 음식을 알아보고 같이 만들어 먹으며 우리몸도 환경도 살리자는 의미의 소모임을 시작했다. ‘절기살림’ ㅎㅎ

내가 그 모임의 지기를 맡게 되었는데 첫모임에서 같이 동지팥죽을 만들었다. 햇 팥을 압력솥에푹 삶아 껍질까지 갈고 같이 새알심도 빚고 보글보글 끓여서 먹었더니 너무 맛있었다.

옛날엔 동지가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이자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니 한해의 시작으로 여겼단다.

 

“새알심은 해를 뜻하고 검붉은 팥죽은 검은 밤을 뜻하여 검은 밤에서 새해가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을 먹는다고 한 것도, 깊고 검은 밤에 갇혀 있는 새알심을 먹어야 새해 곧 새로 한 살을 먹는다는 것이었으리라.

 

또한 팥의 붉은색은 벽사의 기운을 몰아내는 효험이 있어 음귀를 쫓는다고 믿었다. 붉은색은 따뜻한 양의 기운을 대표하니 음이 가득한 겨울의 찬 기운을 밀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팥은 따뜻한 기운을 오래 머금는 능력이 있어 팥을 이용해 찜질하는 민간요법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팥에는 해독 능력이 뛰어난 사포닌이라는 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익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이어서 해가 밤에 갇혀 죽는 날이고 동지가 지나면 죽은 해가 다시 살아나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옛날엔 동서양 공히 동지를 새해의 시작으로 보기도 했다. 중국의 고대 국가인 주나라에는 동지를 설날로 삼았고 서양에서는 예수의 생일인 크리스마스를 동지 근방으로 잡아 새해의 기점으로 삼았다. 우리는 예부터 동지를 작은 설날, 아세라 하여 정월 설날만큼 동지의 의미를 새겼다. “

-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중에서.

 

그렇게 끓여온 팥죽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내가 주문한 요리책인가 싶어 나가보니 박스가 두 개였다.

 

우리 동서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준것이다.

 

내가 좋아할만한 책으로 골라 넣었을 생각을 하니 너무너무 감동적이었다. 엽서내용 읽다가 너무 기뻐서 어떤 기운이 승천하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서호책방 지기님의 뽀나스 선물까지😍.

 

이래도 되나 싶게 너무너무 좋았다.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난다며 툴툴대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남아있는 메인 이벤트!!!

과천시향이 크리스마스 공연으로 무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

 

나 진짜 무슨 호강인지 모르겠다.

올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통으로 들었던것도 손에 꼽을만한 감동적인 일이었는데 크리스마스 이틀전에 베토벤의 합창이라니…

 

처음엔 유투브 생중계 공연인줄알고 시간만 알아두고 있다가 나중에 관람공연이라는 걸 알고 늦게 예약하는 바람에 자리는 안좋았지만 오랜만에 현장에서 듣는 음악이라 그 자체로 행복했다.

 

사실 나는 툴툴쟁이다.

뭔가 기대에 맞지 않거나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계속 툴툴댄다. 맘에 안드는 그 점에만 집중하다가 정작 좋은 것들을 다 놓친다. 그냥 넘어가고 즐겼다면 좋았을것을 … 원인을 생각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원망하거나 짜증내느라 상황을 더 망친다.

너무 좋아하는 일이거나 기대가 클수록 툴툴의 정도도 더 커진다. 언제부턴가 그런 나를 깨닫고 안그러려고 노력한다. 장점을 발견하고 감사할거리를 찾으려 애쓴다. 그러다보면 정말 좋은 발견을 하기도, 기분이 나아지기도, 새로운 관점을 얻기도 한다.

 

이 연주회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 자리는 앞에서 두번째 줄이었기 때문에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도 연주자들이 잘 보이지 않았고 합창 교향곡의 하이라이트인 합창단의 모습도 연주와 어울리는 배경화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실망하고 자리를 탓하지 않고 그 자체로 즐기자고 마음먹으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1부에서 연주된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곡 연주자의 모습이 아주 잘 관찰되었다. 늘 오케스트라의 중간 뒤쪽에 위치해 잘 몰랐던 관악기 연주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특히 호른은 소리가 나는 벨 안에 오른손을 넣고 연주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부드러운 음색을 내는 악기인줄도 몰랐다. 바순이 생각보다 훨씬 낮은 음이 난다는 것도, 오보에와 클라리넷은 늘 헷갈렸는데 리드의 모양이 다르고 악기의 벨 크기가 다르다는것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앉았기 때문에 연주자의 표정이나 중간중간 악기를 닦거나 뒤돌아 손질하는 장면까지 엿보게 되었다.

 

제1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은 어디부터 다른 파트를 연주하는지, 첼로연주자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콘서트마스터는 주로 어떤 자세로 연주하는 지등 평소 잘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보였다.

 

합창단원이 모두 일어나 폭발하듯 소리를 내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 울림은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 덕에 앞자리에 사람이 앉지 않으니 시야도 확보된 채로 연주회를 즐겼다.

 

내 친구의 시부모님은 음악을 너무 좋아하셔서 만약 인생에서 눈이 멀거나 귀가 멀거나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선다면 망설임 없이 눈이 머는걸 선택하겠다고 … 음악을 들을 수 없는건 상상할수도 없다고 하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연주를 듣고있자니 그 말이 떠올랐다.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더욱이 합창교향곡은 오케스트라 뿐 아니라 합창단이 따로 연습하고 합주했을테니 더 많은 사람들이 애써야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의이브에 ㅎㅎ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쁘고 좋았다.

 

 

어떤 자리에선 보이는 것들이 다른 자리에선 보이지 않는다. 어떤 위치에선 당연한 일들이 다른 위치에선 당연하지 않다. 내가 왜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는지를 따지고 불평하기 보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것들을 충실히 누리는 사람이고 싶다. 그 자리에서 보이는것이 당연한것이 아님을 알고 늘 감사하며 보이지 않는 위치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성숙한 인간이고 싶다.

 

코로나로 연주회장도 전시회장도 훨씬 못갔던 올해지만 그 어느때보다 황홀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과 베토벤의 합창 전곡을 들었던 뜻깊은 해 이기도 하다. 세상엔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지금도 나는 맘에 안드는 것을 만나면 불평이 먼저 튀어나오는 인간이지만 좋은점과 감사한 점을 찾으려는 노력하는 꾸준히 할 것이다.

그래서 서서히 툴툴쟁이를 벗어날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해두고 싶었다.

올해의 감사한 크리스마스~^^

 

 

 

댓글